이 글은  2017년 12월, 엄제현 필자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시민사회는 보편적 허위 속에서 아무런 매개 없이 진실된 것을 세우려 들면서 진실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전환한다. 경제적으로 결정된 체계 속에서도 순수한 감정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주장되면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이해관계의 지배를 위한 알리바이가 되며 존재하지도 않는 휴머니티를 생산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옮김. 도서출판)

동시대 예술의 작업들에서의 공약수가 될법한 단어를 꼽자면 아마 ‘만끽’이 아닐까.

오늘날 시행되는 작업들은 각기 자신만의 기억을 토대로 자유로이 시간을 유영하며 약자의, 또는 패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재량껏 재단하고 본떠 작업으로 조형한다. 민속학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 같은 민요의 발굴 작업이라던가, 이민자의 역사와 관련된 물품의 전시를 늘어놓고 그들의 이주동선을 매핑(mapping)한다거나, 민중들의 습속을 통해 전승되던 각종 제례들을 재현하는 것까지 공식적이고 범례적인 역사로부터 일별해 고고학과 유사한 폼으로 작업의 리서치를 해나가는 작가들은 모두 제 나름의 동기와 기억을 토대로 특정한 서사를 꾸려나간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작업이 될 수 있고, 또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가 선언됨으로써 예술가들은 그 어떤 오브제건 도료로 삼아 세계를 만끽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 경제와 화폐를 매개로 한 시장의 폭력이 모든 공동체를 분쇄하고 개인을 고립시키며 대도시에서의 현대인들을 섬의 삶과 같이 고독하게 만들었다며 오늘날의 상황과 조응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은 어떠한 곳에 있을까 고민하는 작가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작업의 형태들은 마을 만들기, 밥상공동체, 생태공동체, 풀뿌리운동, 아파트공동체, 라디오공동체등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더라도 적지 않은 수의 운동들을 연상시킨다. 전거한 다양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여기’라는 헤테로토피아적 코드일 것이다.


사실 ‘지금-여기’에 집중하는 것은 비단 예술의 일만도 아니다. 프로이트로부터 발원한 정신분석학은 오늘날 사사로운 사이비 카운슬링으로 전락해 일상에 만연해 있고, 정신병원에선 환자의 증상의 원인을 발견해 치유하려는 관점을 내려놓고 ‘지금-여기’에 초점을 맞춰 대증적인 치료를 반복하고 있다. 환자의 리비도가 생애 어느 부분에서 트라우마로 각인되고 고착되어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나는지 형식을 파악해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는 방법론은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사장되었다. 우울증은 분석이 아닌 약에 의해서 해결된다. 약의 처방은 비용절감적이고, 시간에 있어서도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부족한 의료 인력과 반대로 넘쳐나는 환자들의 상호요구의 효과적인 대안처럼 보인다. 같은 증상을 놓고 해결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어 변질되었다. 정신질환에 대해 정신병원이 대처하는 방식이란 ‘지금-여기’의 증상만을 겨냥해 문제로서 마주하는 것이 되었고 정신병리학은 약리학으로 후퇴했다.


예술에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안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형식이라는 것도 어떤 특정한 (과거 또는 미래) 시간을 상정하고 기획해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듯이 기민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어떤 수상쩍음이 느껴지는 건 나의 과민함 탓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예술이 실천하고 있는 ‘지금-여기’의 형식이 더 이상 미래라는 것을 상상하지 않기로 한 자본주의 정신의 물화된 사유이며, 그것이 작금의 지배적인 운동방식을 유려하게 재생산하는 데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프로파간다와 같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또한 어쩌면 정신분석학이 경제적인 논리로 인해 ‘지금-여기’에 몰두하게 된 것처럼 예술 역시 완전히 자율적인 듯 행세하지만 그러한 뽄새를 가능케 한 비밀스러운 지배로써 경제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후기산업사회의 생활 방식이 자연법칙처럼 기능하고 있는 사회에 표표히 떠오른 주체는 더 이상 그것을 역사적인 발전 단계에서의 독특한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는 더없이 궁극에 이른 듯 보이며, 전면적인 개혁이나 새로운 생활양식은 절대적으로 상상 불가능한 금지가 되었다. 그러한 것을 주장할라치면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이제 슬플 정도로 익숙해진 냉소와 조롱일 것이다.


앞서의 꿈들을 꿀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역사로 하여금 격퇴되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명한 실패로 간주되어 재기하기란 요원한 미몽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짤막한 여운과 향수뿐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이에 따른 반증이라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세계는 스스로를 감추어버렸다. 체계나 총체, 구조 따위는 누군가 우리를 약올리려는 듯 은닉되어서 이제 우리는 객체 없는 세계, 즉 나타나는 바대로의 세계를 경험을 통해서만 언술할 수 있는 주체로써 산적한 문제들을 미시적인 기억에 의거해 처리하도록 변조되었다. 그 때문에 보편을 부르짖을 수 있는 정치가 실종된 공허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응당 희생과 결여, 고통과 분담, 그것들을 아우르는 공감과 윤리일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의 아픔을 비토하여 타인과 점근선적으로 마주친 뒤 윤리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기능하는 공동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명칭만 약간씩 다듬어 새롭다는 듯 등장한다. (양적인 조절을 질적인 차이인 것처럼 포장해 선전하는 상품의 피상적인 차이와 이러한 운동들의 주장은 별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들이야말로 직접적으로 매개할 수 있는 것들이 객관적으로 완전히 소거된 동시대에 대한 무력한 반동 아닌 반동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소비와 생산의 가능성으로 가늠되는 ‘양적 주체’로 굴절되어 식별되는 것으로 접어든 마당에, 처한 사실에서 눈을 돌려 자생적인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고 또 실천하는 일들은 실상 타조의 전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알레르기와 거부증으로 객관적인 폭력과 규칙적인 착취를 거부하려고 하더라도 미시적 공동체는 그것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실패하고 더없이 순진하게 종속된다. 결국 저항도 뭣도 아닌 텅 빈 몸짓, 집단적 수음행위로서 초기부터 불임(不姙)이다. 자본주의를 명징하게 비추는 거울이기는커녕, 변증법적 저항을 포기함으로써 문제설정을 달리해 자본주의를 영속화하면서 자본주의로부터 반사된 물화된 사유를 시연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설사 공동체의 유지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용인한 보호구역 안에서만 영위된다는 사실은, 보장된 쾌락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듯이 그러한 도피를 한껏 초라하게 만들고 ‘대안’으로써 인준되는 것에 지체없이 퇴짜를 놓을 것이다. 그러한 것은 이미 투어 패키지가 유례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임무이기에 앞서의 시도들은 문화산업의 축소재생산이라 정의 내려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의 논의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고 ‘지금-여기’에 몰두한다는 일은 무언가의 올가미에 영락없이 걸려드는 일은 아닐까? 현재를 예찬하는 온갖 수사들은 달콤한 꿈처럼 주변을 채색할 것이다. 그러나 달콤한 꿈은 이미 수천 년도 전에 자로의 눈물로 화해 대지에 스미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제스쳐는 어떤 것일까. 섣부른 공동체는 여지없이 지배적인 오늘을 치장하는 변방의 영토를 하사받는다. 왕으로부터 봉작된 신하의 땅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직접성을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의 지배적인 매개와 중첩해 그것을 강화하는 모순과 직면하게 된다.


자본의 관용에 의해 마련된 조차지는 일시적이기 때문에 더없이 위태롭고 볼품없다. 순간의 공동체란 공허하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잠정적으로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직 파괴되어야 할 공동체만 있을 것이다. 허면 예술이란 오롯한 자연인 것처럼 둔갑해 기능하고 있는 금융경제와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 공조하고 있는 권력과 지식의 균형잡힌 교란 속에서 내적인 성찰로 연결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역사를 몸으로 쓰다.’라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곳의 3관에는 타나카 코키의 <5명의 피아니스트에 의해 동시에 연주되는 피아노(첫 번째 시도)>가 상연되고 있다. 코키는 하나의 피아노 앞에 5명의 각기 다른 장르를 전공한 피아니스트들을 앉혀 그들이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곡을 구상할 것을 요구하고, 5인이 만들어내는 화음을 전시관에 틀어놓는다.


코키의 작업에서 우연히 매개된 것들이 우리 시계(視界)에서 특수하게 조직될 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나, 순간적으로 마주쳐 조성되는 공동체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일종의 수사는 우리의 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피아니스트들의 손가락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협음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제외한 시간들이 산출할 비참한 소음을 살얼음처럼 치장하며, 일시적인 공동체가 발휘하는 찰나의 일치란 그것이 비산한 뒤 이윽고 비극으로 회귀할 것을 형형하게 지시하고 있다. 우연한 매개란 그것의 독특함으로 인해 조망되며, 그 우연함으로 인해 잠시 외곽으로 밀려난(outshine) 필연성이란 이윽고 우연한 것이 우연했던 만큼 더욱 참람되게 필연적인 자연으로 뒤집혀 우리의 삶을 쥐어짜 질식시킨다. 일시적인 것에서 특정적인 일치를 희망하는 기획들은 하나같이 일탈의 노정에서 임의의 교차를 이룬 듯한 모습을 띠어 우리에게 섬세한 인상과 낯선 정서를 보장하지만, 오늘날의 일탈은 여지없이 순응의 코드를 위해 기능하는 것일 때 이러한 시도들은 이제 폐지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위와 유사한 모든 예술들은 그 가능성이 폐경되었다.


아도르노는 어떤 회상도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의 미래와 무관하게 즉자적 존립이 보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래가 위태로울 때 마찬가지로 위태로워지는 것은 과거일 것이고, 미래라는 것이 증발한 세계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위태로움 속에서 삶을 연장하고 있다고 경각해야 할 것이다.


과거가 악무한(惡無限)을 격하고 자신이 흠 없이 착륙했노라 선언하며 ‘지금-여기’의 우리와 맞닿아 서커스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오늘 더하기 더 많은 선택’만이 있는 시대까지 당도했고,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로 더 이상 견주듯이 더 나은 미래를 선전하고 뽐내지 않아도 되는 체제는 미래라는 것을 슬그머니 감추어두었다. ‘미래-없음’이 시대적인 질병이라면 정치가 문화로 전도된 세계에서 그것의 증상은 두말할 것 없이 문화로 나타날 것이다. 주체가 끔직스러운 오늘만을 무한히 반복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제출된다.


영화 <하루, 2017> <사랑의 블랙홀, 1993>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2016> <소스 코드, 2011> <7번째 내가 죽던 날, 2017> 웹툰 <10월 28일, 2017> <죽어도 좋아,2015> 등 앞의 작품들은 모두 주인공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오늘에 ‘끼인’ 존재로 설정되면서 더 이상 내일이 없는 미쳐버린 세계에서 미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내용상에서 다종다양하게 멜로, 액션, 스릴러 등 각기 다른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의 형식은 그렇게 계속되는 오늘 ‘안에’ 문제가 있으며, 동시에 해결의 실마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탈출구는 오늘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와중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써 인식해왔던 사건이나 인물, 사물을 ‘문제’로서 대면하고 반성할 때 내보여진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의 성찰을 통해 정체의 원인을 찾아낼 때 미래란 자신을 힐긋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들 작품이 등장하는 시간이 구소련의 몰락 이후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스산하고 음울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나의 주장이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1941년의 말콤 제임슨의 doubled and redoubled가 1941년에 등장한 것의 연유는 어떤 식으로 설명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2차 세계대전이 시대를 완전히 파국으로 몰아넣으며 하루의 생이 연장되는 것이 마치 덤처럼 느껴졌다던 시대의 징후로써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 답변할 것이다. 불완전한 하루를 반복하는 주인공이 완전한 하루를 살기 위해 무한한 오늘이 계속되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으로 인해 가차없이 박살난 하루들과 완(안)전한 하루에 대한 소망을 대립적으로 수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모리 네크로맨싱⟩, 2017, 주현욱


이제까지의 이유들로 인해 이번에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에서 전시된 ⟪배드 뉴 데이즈⟫ 콜렉티브의 전시는 특별했다. 각기 좋은 기획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주현욱 작가의 ⟨메모리 네크로맨싱⟩을 상찬할 것이다. 그는 과거 우리를 조감하던 정치적인 기억들이 불분명한 무엇인가로 희석되었으며, 정치는 완전히 문화로 전도되었다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3D 프린터를 통해 열화된 폼으로 구성된 동상의 파편들은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의 말대로 더 이상 우리는 ‘스스로의 연대기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서사화해내지 못하게 된’것이다. 그것의 가장 알기 쉬운 예시로는 유행가를 들 수 있을 것인데, 군 입대 당시에 걸그룹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로 시간을 계측하는 방법이 요즘 20대의 입대당시의 시간을 기억하는 방법, ‘문화에 연동된 자각’일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대해 갖는 향수란 완전히 문화적인 것에 국한되어 버렸으며, 당시의 음악이나 상품들은 기스 한 줄 없이 고증된 채로 미디어에 등장하면서도, 그 시절의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어 도모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실종된 정치가 어디에 있냐고 혹자가 물으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혁명, 러시아 혁명,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굵직한 역사, 세계의 운동 방향에 스핀을 걸었던 대문자 역사들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한 토대로 자리잡고, 아카이브적 문화를 배태시켜 서사화할 발판으로 기능하고는 이내 배경으로 밀려나버리기 때문이다.


<메모리 네크로맨싱>은 기억한다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또는 불충분성)을 반복해서 (동상이 비치된 테이블도 계속해서 회전하고 있다.) 강조하며 더 이상 사유하지 못하게 된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 너머를 사유하자고 단호히 제안한다. 바로 나쁜 새로운 날에서 시작하자고 주현욱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동시대예술이 말하는 ‘지금-여기’와 다르다는 것은 구구절절한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물화된 사유로서 지금-여기에 매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들, 대문자역사의 기억불가능성을 사유하면서 정치적인 시도를 선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메모리 네크로맨싱>같은 형상의 작업은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정치적인 개입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을 내놓았다고 해도 지나친 편애는 아닐 것이다.


주현욱 작가는 다른 예술들이 하는 방식처럼 바깥으로 도망가면서, 또는 한 발짝 거리를 두면서, 또는 외부의 것으로 내부를 탄핵하려는 시도로 작업을 구상하지 않으면서 오늘날의 지배와 억압을 이미지로 드러내려 하고 있다. 무언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도한다면, 그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당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심도 있는 탐독을 계속하는 그의 내적인 반성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웹진 크리틱-칼에 게재 되었습니다.

http://www.critic-al.org/2017/11/15/frozen-sle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