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3월, 웹진 21sss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 되었습니다.







LEE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계기부터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JOO : 데뷔는 2016년 <안무랩>이었어요. 하지만, 작업은 2012년 군대를 전역한 후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12년도부터 14년도까지 정말 왕성하게 작업했는데, 지금 보면 흑역사에 가깝네요. 그래도 이 시기를 빼놓고 내가 걸어온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LEE : 작업을 전개할 당시 주변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JOO : 홍성민 선생님이 운영한 ‘포도포도’라는 웹진이 인생을 구원했습니다. 2010년까지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월간디자인이란 잡지를 틈틈이 구독했는데, 홍보코너에 실린 <포도포도>의 배너를 보게 되었죠. 웹진에는 개념미술, 플럭서스, 다다이즘, 발터 벤야민, 로버트 모리스, 백남준 등의 어려운 글이 난무했습니다. 포도포도의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며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LEE : 첫 작품은 2013년에 발표하셨습니다.

JOO : 2013년에 대학에 입학했어요. 학교에는 의욕 넘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이시우 학우가 ‘계원스리가’라는 경기를 기획했는데, 이것은 학생들의 작품 출품을 통하여 1 대 1 작업 배틀을 붙는 리그 매치였어요. 관전하는 모든 학생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다수결에 의한 승패가 결정됩니다. 그곳은 열정과 눈물, 오해와 질투,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콜로세움이었죠. 대학 시절의 대표작 <주현욱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는 계원 스리가에서 발표되었습니다.


LEE : <주현욱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제목이 독특하네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JOO :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며 간단한 룰이 있어요. 먼저 관객에게 카드를 배포하여 새로운 이름, 성격, 헤어스타일을 제안받은 후, 슬롯머신을 돌려 제비뽑기를 합니다. '주현욱'으로서의 모든 자율권을 잠시 포기하고 당첨된 카드의 캐릭터로 2주를 살아요. 23년에 걸친 ‘주현욱’의 정체성은 위기에 빠지고 다른 무언가로 위상이 변화됩니다. 이 작업은 “나”라는 것은 흡사 액체와 같이 유동적이라는 선언이었죠. 제비뽑기로 정해진 임의의 유리컵에 “나”를 옮겨 담는 이 작업은 이렇게 외쳤어요. “어떤 유리컵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유리컵이 아니라 내가 액체 상태라는 것이다.”


LEE : 제비뽑기에 당첨된 스타일로 머리 자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멀쩡한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 기분은 어땠나요?

JOO : 갓파 컷, 헤이아치 컷, 사무라이 컷 등 살면서 다시 못해볼 헤어스타일 카드가 많았는데 온순한 게 걸려서 아쉬웠어요.


LEE : 2014년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포스팅이 올라왔네요. ‘예술은 혁명이다’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흥미로운 사진이었죠.  당시 강신대씨, 권시우씨, 정강산씨도 함께 보이는데,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요?

JOO : 그 사진은 사연이 있어요. 당시는 현예창 학생들과 함께 졸업 전시를 준비할 때였어요. 마음에 드는 공간이 있었는데, 행정상의 오류로 해당 공간은 사진예술과 친구들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형예술제에 참여할 수 없어도 전시가 끝난 후 공간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학교 측에서 “조형 예술제 기간 중에 졸업전시를 마치라”고 못을 박아버렸다는 점이었어요. 아마 그 편이 학교 홍보에 더 유리하였겠죠. 궁여지책으로 고안해낸 것이 예술제 기간에 가짜 졸업전시를 하자는 아이디어였어요. 꼼수 같은 전시를 <맞불>이라 이름 짓고 학과 전원이 4일간 제도 비판 퍼포먼스를 벌였어요. 사진은 <예술 혁명당 선언>이라는 이름의 가짜 졸업전시의 폐막식이었습니다. 혁명적 예술이 지켜야 할 몇 가지 강령을 함께 선언한 후, 학교 한 바퀴를 돌고 퍼포먼스는 마무리되었어요.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졸업전시보다 <맞불>전이 더 기억에 남아 있네요.


LEE : 사회학자이자, 문화 평론가인 서동진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현재 작업에도 큰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JOO : 서동진 선생님은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이는 오늘날의 세계가 결정적인 부자유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주었어요. 어려운 얘기들이 아니라 코앞에 벌어지는 생생한 예시를 통해서 말이죠. 그의 가르침은 <주현욱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스스로의 액체 상태를 강조하며 자유롭게 넘실거리기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것이 마개가 단단하게 봉인되어있는 견고한 유리병의 형태라면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유리병의 형태를 바꾸지 않는다면 액체는 근본적인 변화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나”를 둘러싼 유리병을 보기 힘들었던 것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21세기가 갖는 시각의 문제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상상도 불가능해진 암울한 시기에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 밖에 없는 시각. 우리는 포스트 이데올로기라고 불리는 21세기의 유리병 안에서 모든 형태의 액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단 유리 병을 깨뜨리는 자유만 빼고 말이에요.








LEE : 본격적인 작업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어요. 첫 데뷔라 할 수 있는 국립 현대무용단 안무랩과 함께 진행한 <21세기를 위한 SF 안무>를 발표하셨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JOO : <21세기를 위한 SF 안무>는 앞서 말한 21세기라는 유리병을 조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20세기적 유토피아인 미래주의를 소환하여, 오늘날의 “유토피아 없음”과 대비해 보여주는 방법론을 취했어요. 프로시니엄의 액체성을 강조하는 동시대 공연의 유행을 거부하기 위해 고전적인 프로시니엄을 고수하였는데, 몇몇 비평가와 안무가의 비판을 받았죠. 비판의 요지는 관객과 무대의 거리 설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프로시니엄을 해체하지 않음에 대한 그들의 비판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하지만 비판에 대꾸하기 위해 형식으로 대답해야 함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연찮게 미래주의적 형식마저 활용해버린 게 아닐지 의구심이 있어요. 미래주의 화가, 자코모 발라가 좋은 예인 것 같아요. 에드워드 마이브릿지의 활동사진을 그대로 화판에 옮겨 담은 그의 문제의식(시간성의 붕괴)은 유효했으나 이것을 회화 자체의 질문까지 끌고 간 것은 말레비치였잖아요. 마찬가지로 <21세기를 위한 SF 안무>가 다음 작업의 주제를 열어준 건 분명하나 형식적 고민에서는 아직 순진했던 것 같아요.


LEE : <21세기를 위한 SF 안무>에 형식적 고민이 부족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다음 작업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보안했나요?

JOO : ⟨프로즌 슬립 / 타임 슬립⟩에서 이 고민의 실마리를 찾아냈어요. 애초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금수산 태양궁전에 박제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을 차용하였죠. 이 작업엔 어떤 역설이 숨어있었습니다. 절대 차용될 수 없는 이 숭고한 신들을 무엇이든 차용할 수 있는 동시대 미술의 장에 소환했을 때의 난센스가 바로 그것이었죠.  20세기적 오브제가 21세기적 다원주의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모든 것을 차용할 수 있는 디제이로서의 미술가가 미끄러지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디제이의 혼성모방이 유리병을 깨지 못한 채 액체의 유동성을 강조할 때, ⟨프로즌 슬립 / 타임 슬립⟩에는 그것의 틈새를 보여 주는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형식에 묻은 20세기적 얼룩을 전면으로 보여주는 전략으로 “적대의 조각antagonistic sculpture”이라 명칭 한 형식적 실험을 심화 시키고자 했습니다. 21세기의 유리병이 어떤 역학으로 봉인되어있으며, 어떤 균열을 가지고 있는지 끈질기게 응시하는 전략이었죠. 


LEE : 적대의 조각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JOO : 동시대 미술 형식에 존재하는 모순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는 전략입니다. 끊임없는 형식적 전복으로 미술 게임을 이어가는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형식적 다음 장을 그리려는 시도였어요. 산티아고 시에라에게서 힌트를 얻었어요. 그는 최저 임금을 주고 유색인종, 부랑자, 창녀 등을 고용하여 폭력적인 퍼포먼스를 하잖아요? 관계의 미학의 적대를 들춰내는 행위라고 말한 클레어 비숍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시에라는 관계의 미학이 어떤 “관계” 하나를 억압하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의 관계는 화폐로 인한 교환 관계를 말하죠. 그것이 다른 모든 관계를 결정지어주는 우리들의 역사적 단계에서 수평적인 호혜성 따위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제가 이어가려는 작업은 산티아고 시에라가 최초에 발견한 그 균열을 미술적 형식까지 적용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이 21세기에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적 전략 중 하나일 것입니다.






LEE : 최근작 <메모리 네크로맨싱>에서 적대의 조각이라는 컨셉을 어떻게 발전시키셨나요?


JOO : ⟨프로즌 슬립 / 타임 슬립⟩이 “차용 미술” 안의 적대, 즉 차용 미술이 가능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했던 것을 보여 주었다면 ⟨메모리 네크로맨싱⟩에서 조금 더 나아가 봤습니다. “아카이브 미술” 영역의 적대까지 상기시킨 것이에요. 아카이브 미술이 가능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했던 것은 대문자 역사입니다. 이 작업의 동상은 대문자 역사를 대표하고 있죠. 전형적인 20세기식 매체인 '동상'은 지금도 20세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역사적 상징이 아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랜드 마크나 문화재로 전락했죠. 모든 동상들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그것의 상징적 위치를 박탈 당했으며 그로 인해 많은 동상들은 물리적 위치까지 변하기도 했어요. ⟨ 메모리 네크로맨싱⟩은 한때 역사의 위치에서 서사화되었던 기억들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서있을 때, 빈 구멍을 들여다보는 작업이었어요. “기억의 강령술”이라는 뜻의 이 작업은 동상들을 21세기의 유령으로 호명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LEE : 작업은 영상, 설치, 퍼포먼스를 넘나듭니다. 작품 제작에 있어 매체는 어떻게 선택되나요?

JOO : 작업을 구상할 때 매체라는 범주를 최대한 느슨하게 풀어놓고 접근하려 합니다. 좋은 문장을 찾아 헤매는 문필가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아요. 예컨대 <메모리 네크로맨싱>의 경우, 동상을 3D 스캔하는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보여주었으며, 결과물은 전시장에 설치하였죠. 작업 초기부터 매체의 콜라보레이션(?)을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해당 매체가 작업이 말하려는 바에 적절하다 판단했을 뿐이죠. “매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중요한 건 컨셉이다”는 말로 오해받지 않길 바랍니다. 매체가 작업의 핵심적인 지점이기에 감히 한 가지로 닫아둘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LEE : <21세기를 위한 SF 안무> <프로즌 슬립 / 타임 슬립>을 발표한 후, <배드뉴데이즈>라는 콜렉티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콜렉티브 결성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JOO : 배드 뉴 데이즈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에 만들어진 콜렉티브입니다. 미술과 시간성에 대한 고민을 중심으로 여섯 명의 멤버가 결집되었어요. 작년에는 전시와 함께 비평 책자도 발간했습니다. 활동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던 미술사조 운동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비평 활동을 중심으로 다음 작업을 위한 미술사 스터디를 이어나갈 참이에요.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완전히 끊어내고 새로운 시간대로 나아가려 한 인류 보편사적인 혁명이잖아요.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이것은 완전히 실패한 기획처럼 보입니다. 배드 뉴 데이즈는 이러한 21세기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안에서 미술이 어떻게 변혁을 구상할 수 있을지 고민하려 합니다. 하지만, 배드 뉴 데이즈는 어떠한 정치적 변혁도 불가능해 보이는 21세기에서 러시아 혁명을 재현할 생각도 기념할 생각도 없어요. 아방가르드가 역사적 지평에서 가능했던 급진적 미술 실험을 전개했듯이 우리는 21세기를 철저히 인식하며 활동을 지속하려 합니다.


LEE : 오늘 인터뷰 감사드리면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세요.

JOO : 배드 뉴 데이즈 활동과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메모리 네크로맨싱>을 다른 장소에서 여러 차례 시연해 볼 계획입니다. 이 작업은 계열체가 쌓여갈수록 레이어가 두꺼워지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장소에서 반복할수록 동시대의 시간성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간과 맺는 양태까지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죠. 메모리 네크로맨싱이 특정 장소의 특수한 시간성에 주목하는 동시대 아카이브적 유행을 역주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모든 장소에 보편적으로 억압된 시간성을 들춰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웹진 21sss에 게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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